함께 가는 길 / 하지만 가지 않은 길

Jane wrote:


4·3사건의 희생자들이 흘린 피가 붉은 동백꽃 되어 나리던

너븐숭이, 동백동산, 백조일손지묘, 그리고, 제주의 모든 곳


“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를 공격하는 무장봉기에서 촉발되었다. 그들이 무장봉기를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1947년 3·1절 기념식 때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주민 5명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3월 10일 경찰 발포에 항의한 총파업 이었다. 제주도 직장의 95퍼센트 이상이 참여한 유례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 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었고, 남로당원 색출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사건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도 잇따랐다.새로 임명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미터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표고문을 발표했다. …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 하에서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해안마을로 피해온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 12월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강경 진압은 계속 되었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 4·3사건은 여기서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약 2만 내지 3만 명,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었다. 그러나 4·3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비극적인 사태를 일으켰다.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했다. 사계리 ‘백조일손지묘’의 희생자들도 이때 학살된 것이었다. 이 때 3천여 명이 죽임을 당했고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인 내용들이 주르륵, 서술되면 읽는 사람이 조금 지루할 까 염려가 되었지만 

도저히 기재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어서 조금 길게, 옮겨 적어 봅니다.


이 글 역시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7-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에서 가져왔습니다.

간단한 역사적 사실들을 앞머리에 옮겨적었고, 그 뒤로는 상당부분 중략하고 마음에 콕콕 아프게 닿는 내용들을 옮겨적습니다. 대부분 이승만정부에 의해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자행된 ‘학살’의 내용들입니다.


제주에는 4·3 사건에 대한 대표적인 유적지가 두 곳 있습니다. 

한 곳은 제주 4·3사건 평화공원 이고, 한 곳은 북촌리에 자리한 너븐숭이 4·3기념관입니다. (물론, 제주의 곳곳이 4·3사건의 유적지이자 학살 현장입니다만,)


두 유적지는 꽤나 대조적인 분위기를 가집니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서도, 평화공원은 그 규모가 크고 약간 허허롭다고 할까요. 천 평은 훨씬 넘어 보이는 넓은 땅위에 연회색 웅장한 건물들이 떡하니 앉아있습니다. 헛헛하고 외롭고 차가워 보여 마음이 닿지 않는 곳. 사람들은 거의 뜸해 수학여행 철이 아닌 이상 발길이 뜸해 보이기도 합니다.(주로 국가 행사 때 사람들이 한가득 방문하는 모양입니다.) 모든 것은 깔끔하게 각각의 자리에 놓여져 있고 위령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약간은 무섭게, 폭력적인 인상을 자아내며 서 있습니다.


반면 너븐승이 기념관은 작고 조촐합니다. 기념관 내부도 전시 공간 2개, 그리고 한 켠에 사무실이 전부이고 위령탑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내부 전시공간에도 전시물이 몇 점 없습니다.


너븐숭이 기념관 위령탑



그러나 이 곳에는 마음이 닿게끔 하는 것 들이 몇 가지 있더군요.

첫째는,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인데, 학살의 희생자들에게 조문을 올릴 수 있는 제단입니다. 높은 벽면의 윗부분부터 시작하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가 적힌 명단과 그 명단들 아래로 간단한 단상이 있는데 그 단상에는 늘 하얗디하얀 국화가 몇 송이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 마음이 와 닿는 것은, 평화공원의 꼿꼿한 위령비와 대조되는 이 곳 순이삼촌 문학비 인데, 이 곳의 위령비는 세로로 반듯하게 세워져 있지 않고 이리저리 널부러져 누워있습니다. 

어떠한 규칙도 방향도 없이 서로 포개지거나 혹은 홀로 외롭게, 크고 작은 위령비들이 누워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당한 4·3사건의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순이삼촌 기념비

순이삼촌 기념비



또, 세 번째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은 바로 아기무덤. 이 곳에는 갓난아기들의 돌무덤이 수 십 구 있습니다. 전시공간에 걸린 희생자들의 명단에도 그 나이가 1살, 4살, 10살 이라고 적힌 어린 생명들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애기무덤 앞에는 털실로 짠 자그마한 아이의 덧신이 가지런히 놓여있었습니다.


너븐숭이의 애기무덤



June과 저는 너븐숭이를 제주 여행의 첫 날 방문했습니다. 

제주를 단순한 휴식과 관광의 섬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제주가 가진 넉넉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품 만큼이나 소실되어서는 안 될 아픈 역사(아니,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아픔)를 새기기 위해서입니다.


갓난아기들의 돌무덤 앞에서, 학살현장을 연상캐하는 힘없이 스러져 있는 순이삼촌 문학비 앞에서, 제주의 북촌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위령비 앞에서 June은 마음아파 했습니다.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지난 어리석은 역사들이 모습만 조금 바꾸어, 가해자만 바뀌어, 시대만 바뀌어 반복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안타까워했습니다.


너븐숭이 뿐 만이 아니라 우리는 제주여행을 다닌 5일 내내 제주의 곳곳에서 4·3의 아픔을 미약하게나마 느껴보았습니다. 

어떤 날은 아무렇지 않게 시원한 바람 맞으며 달리던 중산간의 도로도 문득 아픔으로 다가와서, 중산간 깊은 숲 속으로, 동굴 속으로, 오름 위로 바쁘게 몸을 숨긴 제주민들의 뒷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동백’입니다.

제주에는 동백나무가 많고, 그래서 붉은 동백꽃이 피곤 하는데, 이 동백꽃이 왜 그것을 상징하는지 잘 알려주는 

최상돈 씨의 노래 [애기 동백꽃의 노래] 중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산에 산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둘판에 붉게 붉게 꽃이 핀다네

님 마중 나갔던 계집아이가

타다타다 붉은 꽃 되었다더라.


제주를 그린 화가 강요배 [동백꽃 지다]



겨울에 피어나는 붉은 동백꽃은

지난한 겨울 군인들의 총구를 피해 사철 푸르른 동백숲 깊은 곳으로 몸을 숨긴 제주민들의 모습입니다.

결국은 피하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그들이 흘리는 뜨거웁고 붉은 피인 것입니다.


중산간 도로를 달리다 우연히 발길을 옮긴 ‘동백동산’은 사람의 발걸음이 거의 닿지 않은 듯했습니다.

숲길이 나 있고, 그 숲길 끝에는 오름이 있었다고 했던가요. 그렇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은지 오래인 듯 좁은 숲길은 수많은 투명한 거미줄이 가로막고 있었고, 숲은 깊고 깊게 우거져 해가 들지 않아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어둑어둑했습니다. 나무와 풀에서 내뿜는 냉기와 습기로 어깨가 움츠려 들만큼 서늘했고 적막한 가운데 새의 울음소리는 날카로웠습니다.

돌아 나와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니 동백동산에 대해 제주도 버스기사 아저씨가 그 곳은 귀신 나온다고 제줏사람들도 가지 않는 곳이라고 우스갯 소리르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어쩐지 으스스했다며 June과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그래, 그 곳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추위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억울한 피를 흘렸을 지 우리는 말없이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은 4·3 유적지는 ‘백조일손지묘’

그 뜻을 알게된 June은 마음이 아려온다고 했습니다. 

‘백 할아버지 한 자손의 무덤’ 이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백조일손지묘



한국전쟁 발발 후 정부는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무고한 양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고 합니다. 그 때 130여 명의 제주도민이 한 날 한 시에 처형되었는데, 시신을 찾으려는 유족들을 당국이 막아서고 시신을 양도하지 않아 사건이 지난 지 약 7년 만에 시신이 양도되었으나 이미 오랜 시간 지나 팔, 다리, 등뼈 등이 마구 뒤섞여 신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유족들은 희생자를 한 조상으로 함께 모시기로 했고, 

누구의 시신인지 가리지 않고 머리 하나, 팔 둘, 등뼈 하나, 다리 둘을 이어 맞추어 희생자의 봉분을 만들고 그 이름을 ‘백조일손지묘’라 지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시대 가운데에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했는지, 그리고 왜 그 어리석은 역사는 아직도 되풀이 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답함은 깊은 한숨이 되어 뱉어져 나옵니다.

거뭇한 돌담으로 둘러 쌓인 터 안에 빼곡하게 안치된 희생자들의 묘 앞에서 허리 숙여 삼 배를 올립니다.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우리의 역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 어리석게 되풀이 되고 있고 몰라보게 변한 듯 한 사회 가운데에는 단 한 치도 변화되지 않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주 4·3의 현장들을 둘러보며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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