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 / 하지만 가지 않은 길


매일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멋을 내어보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이 육신을 위해
돈과 시간, 열정, 정성을 쏟아 붓습니다
예뻐져라,
멋져라,
섹시해져라,
날씬해져라,
병들지 마라,
늙지 마라,
제발 죽지 마라...!


하지만 이 몸은 
내 의지와 내 간절한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살찌고, 야위고,
병이 들락 거리고
노쇠화되고 
암에 노출되고 
기억이 점점 상실되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내 것인가?
자녀가 내 것인가?
친구들이 내 것인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누구를 내 것이라 하고
어느 것을 내 것이라고 하던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구름인 것을
미워도 내 인연
고와도 내 인연


이 세상에서 누구나
짊어지고 있는 고통인 것을...!


피할 수 없으면 껴안아서
내 체온으로 다 녹이자
누가 해도 할 일이라면
내가 하겠다.


스스로 나서서 기쁘게 일하자
언제 해도 할 일이라면
미적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에 하자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 쏟자
운다고 모든 일이 풀린다면
하루종일 울겠다.
짜증부려 일이 해결된다면
하루종일 얼굴 찌푸리겠습니다.


싸워서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누구와도 미친듯이 싸우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일은
풀려가는 순서가 있고 순리가 있습니다


내가 조금 양보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배려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낮춰 논 눈높이
내가 조금 덜 챙긴 그 공간


이런 여유와 촉촉한 인심이
나 보다 더 불우한 이웃은
물론 다른 생명체들의 
희망 공간이 됩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이 
정말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정말 고마움과 감사함의 연속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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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쓰는 편지 -도법스님-  (0) 2014.06.10


길 위에서 쓰는 편지

늙은 몸을 이끌고
온 나라를 걷고 또 걸은 도법스님이
화쟁코리아 100일 순례 회향을 앞두고
처절히 돌아보며 길에서 쓴 
눈물어린 편지를 올린다.

그동안 저는 
바깥 얘기를 계속해왔어요.
사회 이야기, 겨레 문제 그런데 
이 편지는 제게 쓴 편지에요. 사뭇 긴데,
제게 쓴 편지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쓴 편지이기도 합니다.

벗이여,
내일이면 화쟁코리아 100일 순례가 끝나네.
화쟁 깃발을 들고 역사 골목골목을 걸었네.
그 어느 곳도 눈물 젖지 않은 땅이 없었네.
생명이 안락하고 행복한 한반도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온 겨레, 온 국민이 치열하게 몸부림쳐 왔음을 봤네.

걷는 내내 역사 속 붓다를 떠올렸네.
붓다가 오늘 한국 땅에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했을까?
알고 보니 붓다는 어느 하루도 절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더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을길을 걸었더군.
피눈물로 삶을 가꾸고 있는 민중 밥을 얻어먹었더군.
식구 끼니를 걱정하는 집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살았더군.
때로는 저주를 받기도 하고 때론 밥을 얻지 못해 굶기도 했더군.
그런데도 늘 적디적은 소유가치로 생존을 이은 반면
무한한 존재가치로 살았기에 늘 평화롭고 행복한 사람
그이가 붓다더군. 역사 속 붓다, 그이 하루하루는 눈물겨웠네.

역사 속 붓다,
그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네.
그이 하루하루는 나를 부끄럽게 했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았을까?
무엇이 그렇게 살도록 했을까?
경전에서는 한결같이 생명들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네.

붓다란 거울에 나를 비추어봤네.
붓다와 닮은 구석이 거의 없더군.
가장 다른 것을 꼽아보니
평소 절을 벗어나지 않고 절 안에만 있었네.
한 번도 굶은 적이 없네.
무시를 당하기는커녕 대접만 받고 살았네.
피눈물로 얼룩진 밥을 먹은 적이 없더군.
생각이나 말이 아니고 실제로
생명들 안락과 행복을 위해 살지 않았네.
오로지 내 편안함, 내 고귀함, 내 깨달음,
내 완성, 내 행복을 위해 살았네.

그런데 문제는
내 삶이 편안하지도, 고귀하지도,
깨달아지지도, 완성되어지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네.
붓다 제자라면 붓다를 닮아야 마땅할 텐데
이름은 불자인데 줄기와 모습은 전혀 달랐네.
어쩌면 붓다와 다른 길을 걸어왔을지도 모르겠네.
붓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내 삶은 왜 붓다와 닮지 않았던 것일까?

유마 힐 말씀이 떠올랐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네.
중생이 편안해야 나도 편안하네.
붓다는 늘 연기세계관으로 삶을 바로보고 있었네.
연기 눈으로 보면 그대가 나이고 내가 그대이네.
내가 우주이고 우주나 나이네.
어느 슬픔, 아픔 문제도 내 슬픔, 아픔 문제 아닌 게 없었네.
그러므로 생명 안락과 행복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 수 없었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래야 하는가?
저를 위해 그이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그래야 했네.
저, 그대, 세상 평화와 행복을 위해 그래야 했네.
그랬기에 붓다 그이는 평화롭고 행복했네.

돌이켜보니 나는 거의 한 번도 온 존재를 바쳐
연기 눈으로 삶을,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네.
대부분 내 인생, 내 절,
내 종단, 내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삶을 세상을 바라보고 살았네.
그 결과가 오늘 내 모습이네. 그러니까
말은 불자인데 실제는 붓다가 비판하고
부정한 삶을 살아온 셈이네.
마땅히 붓다와 닮을 턱이 없었네.
순례 길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에 눈을 뜬 것이네. 늦었지만
다시 붓다를 닮을 수 있도록
발심과 서원을 해 출가를 해야겠네.

이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네.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내 남은 여정을 붓다와 닮은 모습으로 살고 싶네.
지극정성을 다해 흉내라도 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래야 여한이 덜할 것으로 여겨지네.
다시 출가를 꿈꿔야 하겠네.
진정 붓다와 닮은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벗이여,
함께 길을 떠났으면 하네.
더 늦기 전에 붓다처럼 당당하게
길 가는 것을 꿈꾸네.
괜찮은 꿈이라고 여겨지는데 어떤가?
잘 지내게.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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