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 / 하지만 가지 않은 길

Jane wrote :

 

 

 

 

들리는 이름에 이미 아련하고 그리운 느낌이 깃들어 있는 곳. 사려니 숲에 다녀왔습니다.

제주가 품고 있는 무수한 것들 중 우리 두 사람이 유독 좋아했던 곳이 바로 제주의 숲, 원시림 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 일정 중간중간 비자림, 동백숲, 그리고 사려니숲에 들렀습니다.

 

사려니 숲 하면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은 사려니숲 길 양쪽 도로를 따라 나있는 키 큰 삼나무 인데, 심지어 이국적이기 까지 한 청량감과 신비감을 주는 이 삼나무 길은 사실, 1960년대에 인공적으로 재조림되었다 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수 천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원시림을 가로질러 길을 닦아내고, 이 삼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사려니숲길이 삼나무로 인공 재조림된 반면, 숲의 안은 때중나무, 산딸나무, 편백나무 같은 300여 종이 넘는 다양한 식생이 노루, 족제비 같은 동물들과 새, 파충류들과 함께 자라나고 있습니다.

키 큰 나무 아래로는 낯선 풀들이 무성했는데. 코브라처럼 생겨 잎을 안으로 말아 넣은 보랏빛 꽃이 특이해서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았는데, 안내문을 보니 그것은 독성이 강한 큰천남성 이라는 식물이더라구요.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아이들이 많은데, 제주의 숲에는 나무나 풀을 설명해 놓은 안내 푯말이 잘 되어 있습니다. 육지에서 자생하는 것과는 다른 식물들이 많아서 이기도 할 테고, 제주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소중히 여기고, 알리고자 하는 마음도 있겠지요.

특히 비자림에 있는 식물 푯말들은 그 말들이 하나하나 재미있고 우습기까지 했습니다. 나무의 이름이 붙여지게 된 이야깃거리를 써 놓기도 했고, 마치 방문객을 놀리듯 우스꽝스럽게 적어놓은 글들을 보며 숲을 산책하는 것은 또 하나의 묘미였습니다.

 

비자림

 

 

 

사려니숲은 제주시 구좌읍과 조천읍에서 서귀포 남원읍까지 이어지는 15km의 긴 숲길을 품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라고 경계 짓기 어려우리만큼 이 숲은 크고, 깊습니다.

여섯 개의 오름을 가까이에 두고 있고, 사려니 오름을 품고 있습니다.

사려니 오름 정상에 오르면 성산일출봉과 서귀포 문섬과 범섬, 산방산, 그리고 사려니숲을 둘러싸고 있는 오름 동산들이 한눈에 보인다고 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오름 정상까지 다녀가지 못했습니다.

 

이른 아침의 찾은 사려니숲은 그 기운을 곱절로 우리에게 뿜어냈습니다.

아직 새벽 기운이 가시지 않아 공기 중에는 상쾌한 습기가 가득 차 있었고, 땅에서는 찹찹한 기운을 올라왔습니다.

그 차가운 땅의 기운이 불쾌하거나 낯설지 않았고

나무사이를 감아 돌아 불어오는 바람은 깊이 들이쉬는 숨을 따라 몸속으로 그대로 스며들었으며

새소리며 바람소리, 노루의 울음소리 같이 들려오는 소리는 귀를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타닥타닥 발걸음 따라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며, 사각사각 붉은 화산송이석이 발 밑에서 자그러지는 소리는 제주를 떠나온 지 한 달이 훌쩍 넘은 지금도 마음속에 아련합니다.

 

6월 중순 즈음의 사려니숲은 마지막 꽃잎을 우리에게 나려주었습니다.

은은하고 달큰한 꽃의 내음이 꽃잎을 타고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는데, 그 하아얀 꽃잎을 내려주던 나무 이름이 무었이었던가요.

 

제주 숲이 육지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유달리 울창하고 푸르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나무들이, 꽃들이 짖는 표정이 다르다는 느낌마저 받곤 했습니다), 무엇이 다른가 가만가만 살펴보다가 느낀 것은

쓰러져 있는 나무들 이었습니다.

왜, 육지에 있는 숲이나 공원에서는 수명이 다 되어 쓰러지거나 어떤 이유 때문에 부러진 나무둥치는 치워버리곤 하잖아요. 외관상으로 좋지 않다는 이유이거나 혹은 그 나무를 가져다 다른 용도로 사용하곤 하지요. 그런데 이 곳 제주의 숲에서는 스러진 모든 나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제 자리에 있더라구요.

 

그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수명이 다 했다고,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자리에, 사람의 한 세월 보다도 어쩌면 더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켰을 그 나무를 제주의 숲은 그대로 품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누군가와 박물관에 있는 '깨진 도자기'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는데요,

수 천 년 전 유물인 도자기가 깨진 채로 발견되었다고 지금의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유물로서의 가치를 낮게 비추지만

사실, 어쩌면 그 도자기는 깨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느 낯선 나라의 문화 가운데는 도자기를 땅에 깨트려 악귀를 물리친다고 하잖아요.

그것처럼 어쩌면 그 도자기의 완성이랄까, 도자기의 사명은 온전하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지는 것. 이 아니었을까요.

그때 나눈 이야기가 사려니 숲을 걸으며 슬몃 생각이 들었습니다.

좁고 짧은 생각으로는 꼿꼿이 서 있는 것이 '완성' 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려니 숲에 이리저리 누워있는 나무들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해주더라구요.

 

 

사려니 숲에 비하자면 사실, 비자림은 조금 싱거웠어요. 잘 정리가 되어있는 정갈한 숲이었거든요.

천 년이 넘게 살아온 비자나무를 중심으로 그 곳도 제주의 원시 숲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지만

길에는 나뭇가지 하나 없이 흙모래가 가지런히 깔려있는 모습이 왠지 조금 새침해 보였습니다.

 

새천년 비자나무

 

하지만 저는 비자림에 있는 800년 넘게 살아온 큰 비자나무를 ‘아버지나무’라고 이름 붙여 부르곤 합니다.

울타리 처져 보존되고 있는 천년 비자나무 말고, 그 비자나무를 지나 깊은 숲속으로 없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크은 나무둥치를 가진 비자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것이 자아내는 느낌이 마치 ‘아버지’ 같아서 지난 제주여행 때 저는 그에게 ‘아버지나무’라고 이름 붙여 주었습니다.

 

숲 속에서 많은 이들이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숲이 우리를 어버이처럼 품어주기 때문일까요.

제주의 숲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어버이가 되고,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Jane wrote :

 

숨비소리 아련하게 들리던 제주의 북서쪽 구좌해변

 

제주는 사실, 제게 낯설지 않은 곳입니다.

어머니 고향이 제주거든요. 제주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니다가, 엄마는 중학생이 되면서 육지로 유학을 나오셨습니다. 대부분의 친척들은 육지로 옮겨 오셨지만, 엄마가 어린 시절을 제주에서 보냈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친근함이 묻어납니다.

 

아직 제주에 사시는 유일한 친척분은 엄마의 사촌 오빠. 제게는 5촌 당숙이십니다.

6.25 전쟁 때 부모님과 형제를 모두 여의시고 제주까지 피난을 내려와 터를 잡으셨다는 당숙님은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고, 스물이 채 되기 전에 제주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셨다고 합니다.

 

그 제주여인이 바로 지금의 숙모님이신데, 직업이 자그마치 ‘잠녀’입니다. 해녀를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숙모님은 물질을 하신지 40년이 넘으셨다며, 뭍에 있을 때보다 가끔은 물 안에 있을 때가 더 편하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더라구요.

벌이도 좋고 일도 재미있다며 딸이 원하기만 한다면 시키고 싶다고, 해녀 일에 대한 애정을 가득 보여주셨는데, 젊은 여자들 중에는 물질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서 이제 ‘우리가 마지막이다’라고 하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요즘은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것을 뒤이어서 육지에서 젊은 스쿠버들이 와서 물질을 한다고 해요.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니 잠수하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물 속 것들을 쉽게 딴다고 말씀하시는 목소리에서 왠지 모르게 씁쓸함이 느껴지던걸요.

 

 

제주여행 둘쨋날, June과 저는 제주의 북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습니다.

그 곳 구좌읍은 하도리는 제주 해녀의 상징이 되는 곳입니다. 제주 전 지역에 해녀들이 물질을 하지만, 그 중 가장 많은 해녀들이 사는 곳은 바로 하도리입니다.

그리고 물질 뿐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도 바로 이곳, 하도리입니다.

 

하도리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해녀들과 관련된 장소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그 말이 꼭 맞게, 차를 타고 달리며 채 5분을 달리지 못하고 차를 세워서 이곳 저곳에서 해녀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처음으로 발걸음을 한 곳은 갯것 할망당. 갯가의 신당이라는 뜻입니다.

소박하지만 신당답게, 돌담으로 둘러싸여진 자그마한 신당 안은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오색천과 소지가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이 신당에서는 어부와 해녀들의 만선과 무사귀환을 용왕님께 기원 드리는 곳입니다.

 

 

해녀들이 가진 유일한 안전장비는 바로 ‘테왁’이라는 부유도구인데, 이것을 몸에 묶어서 위치를 알리기도 하고 수면에서 잠깐 쉴 때 몸을 의지하는 용도로 쓰입니다.

이렇게 그렇다할 안전장비도 없이 가까운 해안가에서부터 저 멀리 바다 한 가운데 까지 나가기도 한다는 해녀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합니다. 물길을 잘못 타거나, 파도에 휩쓸리는 경우는 아무리 오랜 세월 물질을 해온 해녀라 해도 자연 앞에서 힘없이 스러지고 맙니다.

목숨을 걸고 나온 삶의 터에서 망사리(체취한 해산물을 넣는 그물주머니) 가득 전복을 담아 가족이 있는 뭍으로 무사히 돌아오기를, 해녀들은 이곳 갯것 할망당에서 빌었을 텝니다.

 

 

해녀는 기량의 숙달 정도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물질을 하는 해녀를 ‘애기해녀’라고 부른답니다.

해녀 그룹의 리더는 대상군 이라고 하는데, 이 대상군은 단순히 물질을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덕성과 지혜, 포용력을 보고 해녀들이 스스로 정한다고 합니다. 능력만큼이나 리더십이 중요한 것이지요.

또 날씨를 볼 줄 알아야하는데, 거의 7일간의 날씨를 정확히 예측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해녀들의 일거수 일투족, 특히 건강 상태가 어떤지를 잘 살펴 오늘 물에 들어가도 되는지, 혹은 물질을 하다가도 상태를 살펴 철수시키기도 한답니다.

또 대상군의 능력은 시체를 찾을 때 발휘된다고 하는데, 죽은 시체가 조류에 실려오면 시체 부근 바닷물의 색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펴 시체를 찾고, 바람의 속도와 조류를 계산해서 시체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내기도 한답니다.

 

문화유산 답사기 일부에 대상군을 뽑는 과정이 대화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상군은 64세쯤 되어 물러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사퇴의사를 표합니다. 그러면 모두들

“성님, 무슨 말을 햄수까?”

라며 일단 말립니다. … 대략 후보가 두세명으로 압축되는데 어떤 당찬 사람이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가 모두

“성님은 아니우다게”

라고 비토를 놓으면 … 상군들이 의견을 모아

“순덕이 어멍이 맡아주십서”

라고 제청하면 모두 “그럽시다” 라고 동의해야 비로서 새 대상군이 탄생하게 된답니다.

 

일단은 사투리가 재미있고, 당찬 사람이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 물러날 때를 알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 ‘성님은 아니우다게’ 하고 비토를 놓는 해녀들의 모습에서 제주여인의 그 당찬 기질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갯것 할망당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르다 보니 불터(불턱)에 가려고 차를 세웠는데

저기 멀리에 색색깔의 고무 슬리퍼들이 널부러저 있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십여 켤레는 되어 보이는 슬리퍼들만 한 방향으로 널려있고 사람이 없어서 무슨 일인가 하고 시선을 돌려 바닷가를 보니, 해녀들이 여기저기 흩여져서 물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숨비소리’라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찻길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고 작은 해안마을이어서 조용한 가운데에 구지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파돗소리 사이사이에 ‘휘이이이~’하고 길고 높게 터져 나오는 해녀들의 깊고 애잔한 숨비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의 모습입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그 삶 그대로의 모습.

뜻밖의 만남에 행복한 우리는 입을 이렇게 모아서 ‘휘이이~’ 그 소리를 따라해 보며 씽긋 웃어봅니다.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달려 도착한 곳은 불터.

불터는 제주의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불터는 해녀들이 물질을 하기 전후로 바람을 막고 추위에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쬐는 곳입니다.

몽돌을 둥글게 겹으로 쌓아서 가운데에는 불을 피우는 곳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바람을 등진 가장 좋은 자리는 대상군의 자리이고, 불을 피워 연기가 나는 쪽은 하군의 자리.

불터은 단순히 추위를 피하는 곳을 넘어서 해녀들의 사랑방 역할을

 

 

제주 가장자리를 빙 둘러 자리한 불터를 보면서, 제주를 지키는 것은 제주를 둘러싸고 있는 제주의 여인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스치듯 해 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항일운동에 앞장섰다는 제주의 여인들.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도, 하도리 바닷가에서 들은 나이 지긋한 잠녀의 숨비소리가 아련하게 울려퍼집니다.

 

 

Jane wrote:


[머무름 없는 바람이 부는 곳, 용눈이 오름

용눈이 오름을 사랑한 작가, 김영갑의 갤러리 두모악]


이 곳을 오르는 동안 자꾸만 이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들국화가 노래한 [걱정말아요 그대]가 바로 그 것입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June이 인도에 있을 때, 한국에 있던 제게 보내 온 노래인데,

(그는 종종 이렇게 노래를 선물해주곤 했는데, 보내주는 노래들 마다 마음에 콕콕 박혀서

가끔은 위로가 되고 가끔은 안식과 휴식이 되어 멀리 있는 그를 대신해 제 손을 잡아주곤 했어요.)

그가 보내준 덕에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때에 저는 지나간 일들로 조금 힘들어하던 때였는데,

 그 가사처럼 아무 걱정도 않고, 지나간 일들은 지나간 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이며 흘려보내곤 했습니다.

 



세찬 바람을 마주하고 우리는 나란히 손잡고 용눈이 오름을 올랐습니다.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은 오름이 바람을 막아주어 고요했지만, 오름 위에 오르니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의 바람이 몸을 휘감고 지나갑니다. 

세찬 바람 덕에 머리카락이 주체가 안 되어서, 멀쩡하게 나온 사진을 찾기가 힘들만큼.

 


 

 

 

 

 

 

 

 

 

 

 

 

 

 

 

 

 

 

그 날은 하늘이 조금 흐려서 백록담도, 저 멀리 푸르른 바다도 보이지 않았지만 

날이 맑으면 용눈이 오름에 올라 제주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오름에 오르니 도로를 달리면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입니다. 

용눈이 오름과 이웃을 하고 있는 다랑쉬 오름, 아끈다랑쉬 오름 그리고 이름을 미처 익히지 못한 오름들이 봉긋봉긋, 울쑥불쑥 크고 작게 올라와 있습니다. 마치 죽이 끓을 때 여기저기서 올록볼록 동그랗게 올라오듯이 그렇게 제주 곳곳에 솟아있는 오름이 여기저기서 "나 여깄어!!" 하며 손을 번쩍 든 듯이, 한눈에 보입니다. 그 오름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중산간 도로들과 거뭇한 돌담으로 둘러싸여 황토빛 붉은 흙을 숨긴 밭과 귤농장,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는 무덤들도 보입니다. 멀리 제주 시내도 보이고, 바다도 슬몃 흐릿하게 보이던가요.


시선을 멀리 하면 이런 것들이 보이고, 시선을 가까이 두면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바람과 몸을 섞은채 흔들리는 갈대

그 사이사이 손톱만큼 자그마하게 크고 있는 들꽃

방문객을 위해 볏단 같은 것으로 매트를 짜서 깔아놓은 그것도 눈에 거슬리지 않고 오름의 갈대들과 자연스레 색이 어울어집니다.

 


바람은 찰나의 순간 불어왔다가 머무름 없이 지나갑니다.

그 바람을 맞으면서 모든 지나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힘들었던 시간들과 그 시간들에 대한 아픔과 또 그 시간들이 준 가르침

그리고 결코 보내고 싶지 않은 행복한 순간들 까지도 모두모두 지나가고

또 지나간 만큼 새로운 시간들이 다가옴을 배웁니다.


June이 보내준 노래만큼이나 이 곳 용눈이 오름은 제게 그런 위로를 줍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니, 괜찮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모든 것은 의미가 있으니, 괜찮다. 그러니 후회하지 말아라.

하고 말입니다.

 

 

제주에 가면 June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곳은 딱 세 곳.

이 곳 용눈이 오름과 한라산 영실. 그리고 김영갑 갤러였습니다.

 


 

수 많은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사진작가 김영갑 선생님의 사진에 담긴 것은

바람과 구름, 파도 같은 것들입니다.

모두 제주에 그득한 것들이고, 자연의 것인 것이고,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것들이지요.

그는 틈만 나면 수십키로그램에 달하는 사진 장비들을 싸들고 이곳 용눈이 오름에 올랐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용눈이 오름에 오르면 자연스레 그가 생각이 나고

그는 이 곳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제주까지 왔는데, 용눈이 오름까지 다녀왔는데, 이곳을 그냥 들르지 않을 수 없어서 은근하게 June에게 이 곳에 가자고 압력 아닌 압력을 가해서, 방문하게 된 두모악 갤러리

 

말년에 그는 루게릭병을 앓았는데, 그의 갤러리 곳곳에 전시된 그의 에세이 가운데 이 구절이 유독 마음에 들어옵니다.


‘구름은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몸이 멀쩡할 때 수없이 봐둔 것들을, 몸져누워 있으며 몸으로 깨달음.

구름이 시시각각 변화하듯, 지금 이 순간도 내 몸의 근의 육들은 굳어 마비되고 있노라. 지금 다만 현재를 살 뿐.’

 

 

 

머리로만 알던 것들, 귀로 들어 담아두기만 했던 가르침들이 몸이 아프며 그제야 진정한 '앎'이 되었던 지난날들이 잔잔하게 떠오르면서

그의 투병생활과 그가 작품에 담고자 했던 무수한 감정들이 새롭게 새록새록 다가왔습니다.

 

 

그의 갤러리는 소박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잔잔하고 덤덤하게 그렇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전시관 밖은 또 하나의 전시관이어서 흙으로 빚고 구운 테라코타 조각들이 푸르른 관목들 사이사이에 수줍게 자리 잡고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관리하는 분의 애정을 가득 받는 듯한 나무와 꽃들이 가득합니다. (사람의 애정과 관심을 받고 자란 식물들은 요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고 차분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만 같아요.)

 


 

 

 

 

한 사람의 인생과 고뇌와 움직임들이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함으로 다가온 시간이었답니다.


함께 온 June이 편안하게 좋아해 주어서 감사한 마음. 안도의 한숨 휴우-

 

Jane wrote:


 

일곱 번째 제주 여행기입니다.

제주 여행기를 마무리하지 않으면 다음 여행은 없다는, June의 협박이 은근 걸리적걸리적-

게으름 피우던 마음을 다잡아 기억을 주섬주섬 끄내어 봅니다.


어제 해가 어스름 질 무렵에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다녀왔어요.

도서관에서 제주 4·3 사건 이야기를 담은 현기영선생님의 [순이삼촌] 책을 빌려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거의 9시가 다 된 시간이었는데, 도서관을 나와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오는 길.


 

아파트 단지를 걸어오는데, 한 가족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아파트 현관에서 나와 차로 향합니다.

선두에 선 사람은 그 집 아버지인데, 한 손에는 텐트를, 한 손에는 손잡이 달린 플라스틱 박스 가득 버너와 코펠 같은 것을 들고 가더라구요.

뒤 이어 꼬마 아이는 자기 상반신만한 배낭을 메고 신난 발걸음으로 쫒아오고, 

엄마는 양 손 가득 비닐봉투에 먹거리를 싸들고 약간은 들뜬 표정으로 마지막을 행렬을 장식합니다.


 

‘금요일 밤, 주말에 캠핑 하려나 보구나!’ 하고 세 가족을 보는 제 얼굴이 미소가 슬몃 떠오르면서,

그와 제주에서 캠핑을 하던 것이 생각나더군요.


 

그에게도, 저에게도 캠핑은 처음인데, 요즘 대세라는 캠핑을 즐기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거의 일주일이 되는 제주 여행의 숙박비가 은근 부담이 되어서, 숙박비를 줄여볼까 하고 선택한 곳이었답니다.

육지에서는 캠핑이 몇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경기지역 주변으로 도심에, 외곽에 캠핑지가 많고 온갖가지 캠핑 도구들이 한바탕 휩쓸고 가서, 이제는 슬슬 시들어 가는 즈음이지만,

제주는 캠핑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마치 어젯밤처럼 그 날도 달이 꽉 찬 보름이어서, 어두운 캠핑장의 밤을 은은히 밝게 비춰주었습니다.

조금 가져간 쌀이며 식재료들을 부려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동안

June이 나무를 가져다 한 켠에 불을 피울 준비를 하고 그랬어요.

 

 

우리는 몇 평 되지도 않을 텐트와 텐트 앞 마당에서 이틀을 보내며

간소한 삶의 편안함과 담백함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도록 만드는 그런 편안함과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넘쳐나는 그런 과함 말고,

약간 더 걸어야 하고 움직여야 해서 동선이 길지만, 그것이 없어서 이것으로 어설프게 대신해야 하지만

그래서 편안하고 소소하게 재미있었다.

하는 것이 저의 이틀간, 캠핑 소감 이랍니다!!^^


좀 싱거운 글^^

 

June wrote:-


Jane이 제주 4·3 사건 관련 유적지를 따로 묶어 올려 놓았다. 마음이 하나로 일어 읽기에는 자연스럽고 편했지만 그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덜 아문 상처를 스치듯 쓰라림이 올라온다.



 

사진은 제주 북촌 너븐숭이 기념관 내 강요배 작가의 그림 <젖먹이> 위에 쓴 시



동백동산

동백 활짝 핀 잘 가꿔 진 정원 정도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이거 왠걸? 

 


철 지나 동백은 없고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고 땅에선 스산한 냉기와 습기 뿜어 올라와 고목들 타고 흐르는 귀기 가득한 곳. 이러니 이 곳으로 제주민들이 숨어 들어올 수 있었겠구나 싶다. 하지만 이 곳 조차 안전하지 않아 여기서도 처참히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니... 제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가슴 아픈 곳이다. 참 아는만큼 보이는구나 싶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조금 전만 해도 굳은 얼굴에 말도 없이 손 꼭 잡고 자꾸만 빨라지는 걸음에 뒤도 안 돌아보고 헤쳐 나왔던 동백동산. 다시 간다면 좀 맘 편히 갈 수 있으려나? 끄트머리에는 유명한 습지가 있다는데 거기까진 못 가봤다. 담에 꼭 담담히 거기까지 걸어가보리라. 



백조일손지묘

와, 여긴 또 뭐냐? 이 132위의 내력을 듣고 있자니 가슴이 아려... 참 나.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고 가슴 아픈 역사가 아로새겨진 현장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일어난 사태이긴 하지만 1948년 4·3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부디 극락왕생하셨기를...



제주에 억울한 죽음들이 너무 많았다...


이 모든 것들이 옛날 일이기만 하고 옛 일을 거울삼아 더 이상은 이런 비참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아직도 진도 앞바다에는 그 참사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채 11구의 시신을 품은 채 가라앉아 있는 세월호가 있다. 억울하다. 


Jane wrote:


4·3사건의 희생자들이 흘린 피가 붉은 동백꽃 되어 나리던

너븐숭이, 동백동산, 백조일손지묘, 그리고, 제주의 모든 곳


“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를 공격하는 무장봉기에서 촉발되었다. 그들이 무장봉기를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1947년 3·1절 기념식 때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주민 5명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3월 10일 경찰 발포에 항의한 총파업 이었다. 제주도 직장의 95퍼센트 이상이 참여한 유례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 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었고, 남로당원 색출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사건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도 잇따랐다.새로 임명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미터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표고문을 발표했다. …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 하에서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해안마을로 피해온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 12월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강경 진압은 계속 되었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 4·3사건은 여기서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약 2만 내지 3만 명, 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었다. 그러나 4·3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 다시 비극적인 사태를 일으켰다.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했다. 사계리 ‘백조일손지묘’의 희생자들도 이때 학살된 것이었다. 이 때 3천여 명이 죽임을 당했고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인 내용들이 주르륵, 서술되면 읽는 사람이 조금 지루할 까 염려가 되었지만 

도저히 기재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어서 조금 길게, 옮겨 적어 봅니다.


이 글 역시 유홍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7-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에서 가져왔습니다.

간단한 역사적 사실들을 앞머리에 옮겨적었고, 그 뒤로는 상당부분 중략하고 마음에 콕콕 아프게 닿는 내용들을 옮겨적습니다. 대부분 이승만정부에 의해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자행된 ‘학살’의 내용들입니다.


제주에는 4·3 사건에 대한 대표적인 유적지가 두 곳 있습니다. 

한 곳은 제주 4·3사건 평화공원 이고, 한 곳은 북촌리에 자리한 너븐숭이 4·3기념관입니다. (물론, 제주의 곳곳이 4·3사건의 유적지이자 학살 현장입니다만,)


두 유적지는 꽤나 대조적인 분위기를 가집니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서도, 평화공원은 그 규모가 크고 약간 허허롭다고 할까요. 천 평은 훨씬 넘어 보이는 넓은 땅위에 연회색 웅장한 건물들이 떡하니 앉아있습니다. 헛헛하고 외롭고 차가워 보여 마음이 닿지 않는 곳. 사람들은 거의 뜸해 수학여행 철이 아닌 이상 발길이 뜸해 보이기도 합니다.(주로 국가 행사 때 사람들이 한가득 방문하는 모양입니다.) 모든 것은 깔끔하게 각각의 자리에 놓여져 있고 위령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약간은 무섭게, 폭력적인 인상을 자아내며 서 있습니다.


반면 너븐승이 기념관은 작고 조촐합니다. 기념관 내부도 전시 공간 2개, 그리고 한 켠에 사무실이 전부이고 위령탑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내부 전시공간에도 전시물이 몇 점 없습니다.


너븐숭이 기념관 위령탑



그러나 이 곳에는 마음이 닿게끔 하는 것 들이 몇 가지 있더군요.

첫째는,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인데, 학살의 희생자들에게 조문을 올릴 수 있는 제단입니다. 높은 벽면의 윗부분부터 시작하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가 적힌 명단과 그 명단들 아래로 간단한 단상이 있는데 그 단상에는 늘 하얗디하얀 국화가 몇 송이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 마음이 와 닿는 것은, 평화공원의 꼿꼿한 위령비와 대조되는 이 곳 순이삼촌 문학비 인데, 이 곳의 위령비는 세로로 반듯하게 세워져 있지 않고 이리저리 널부러져 누워있습니다. 

어떠한 규칙도 방향도 없이 서로 포개지거나 혹은 홀로 외롭게, 크고 작은 위령비들이 누워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살당한 4·3사건의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순이삼촌 기념비

순이삼촌 기념비



또, 세 번째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은 바로 아기무덤. 이 곳에는 갓난아기들의 돌무덤이 수 십 구 있습니다. 전시공간에 걸린 희생자들의 명단에도 그 나이가 1살, 4살, 10살 이라고 적힌 어린 생명들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애기무덤 앞에는 털실로 짠 자그마한 아이의 덧신이 가지런히 놓여있었습니다.


너븐숭이의 애기무덤



June과 저는 너븐숭이를 제주 여행의 첫 날 방문했습니다. 

제주를 단순한 휴식과 관광의 섬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제주가 가진 넉넉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품 만큼이나 소실되어서는 안 될 아픈 역사(아니,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아픔)를 새기기 위해서입니다.


갓난아기들의 돌무덤 앞에서, 학살현장을 연상캐하는 힘없이 스러져 있는 순이삼촌 문학비 앞에서, 제주의 북촌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위령비 앞에서 June은 마음아파 했습니다.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지난 어리석은 역사들이 모습만 조금 바꾸어, 가해자만 바뀌어, 시대만 바뀌어 반복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안타까워했습니다.


너븐숭이 뿐 만이 아니라 우리는 제주여행을 다닌 5일 내내 제주의 곳곳에서 4·3의 아픔을 미약하게나마 느껴보았습니다. 

어떤 날은 아무렇지 않게 시원한 바람 맞으며 달리던 중산간의 도로도 문득 아픔으로 다가와서, 중산간 깊은 숲 속으로, 동굴 속으로, 오름 위로 바쁘게 몸을 숨긴 제주민들의 뒷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동백’입니다.

제주에는 동백나무가 많고, 그래서 붉은 동백꽃이 피곤 하는데, 이 동백꽃이 왜 그것을 상징하는지 잘 알려주는 

최상돈 씨의 노래 [애기 동백꽃의 노래] 중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산에 산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둘판에 붉게 붉게 꽃이 핀다네

님 마중 나갔던 계집아이가

타다타다 붉은 꽃 되었다더라.


제주를 그린 화가 강요배 [동백꽃 지다]



겨울에 피어나는 붉은 동백꽃은

지난한 겨울 군인들의 총구를 피해 사철 푸르른 동백숲 깊은 곳으로 몸을 숨긴 제주민들의 모습입니다.

결국은 피하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그들이 흘리는 뜨거웁고 붉은 피인 것입니다.


중산간 도로를 달리다 우연히 발길을 옮긴 ‘동백동산’은 사람의 발걸음이 거의 닿지 않은 듯했습니다.

숲길이 나 있고, 그 숲길 끝에는 오름이 있었다고 했던가요. 그렇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은지 오래인 듯 좁은 숲길은 수많은 투명한 거미줄이 가로막고 있었고, 숲은 깊고 깊게 우거져 해가 들지 않아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어둑어둑했습니다. 나무와 풀에서 내뿜는 냉기와 습기로 어깨가 움츠려 들만큼 서늘했고 적막한 가운데 새의 울음소리는 날카로웠습니다.

돌아 나와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니 동백동산에 대해 제주도 버스기사 아저씨가 그 곳은 귀신 나온다고 제줏사람들도 가지 않는 곳이라고 우스갯 소리르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어쩐지 으스스했다며 June과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그래, 그 곳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추위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억울한 피를 흘렸을 지 우리는 말없이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은 4·3 유적지는 ‘백조일손지묘’

그 뜻을 알게된 June은 마음이 아려온다고 했습니다. 

‘백 할아버지 한 자손의 무덤’ 이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백조일손지묘



한국전쟁 발발 후 정부는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무고한 양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고 합니다. 그 때 130여 명의 제주도민이 한 날 한 시에 처형되었는데, 시신을 찾으려는 유족들을 당국이 막아서고 시신을 양도하지 않아 사건이 지난 지 약 7년 만에 시신이 양도되었으나 이미 오랜 시간 지나 팔, 다리, 등뼈 등이 마구 뒤섞여 신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유족들은 희생자를 한 조상으로 함께 모시기로 했고, 

누구의 시신인지 가리지 않고 머리 하나, 팔 둘, 등뼈 하나, 다리 둘을 이어 맞추어 희생자의 봉분을 만들고 그 이름을 ‘백조일손지묘’라 지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시대 가운데에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했는지, 그리고 왜 그 어리석은 역사는 아직도 되풀이 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답함은 깊은 한숨이 되어 뱉어져 나옵니다.

거뭇한 돌담으로 둘러 쌓인 터 안에 빼곡하게 안치된 희생자들의 묘 앞에서 허리 숙여 삼 배를 올립니다.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우리의 역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 어리석게 되풀이 되고 있고 몰라보게 변한 듯 한 사회 가운데에는 단 한 치도 변화되지 않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주 4·3의 현장들을 둘러보며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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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당

여행/제주 2014. 6. 30. 20:53

쥰이 쓰다 :-


제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가 <당>이었다. <당>에 대해선 제인이 워낙 맘에 들게 글을 잘 써 주어 굳이 덧붙일 얘기는 없다. 그래서 그냥 사진 한 장 투척~



 



June wrote:-


중산간 도로 어디쯤 

만장굴 가는 길 


 

제주 중산간 도로를 다니다보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중산간 도로는 한라산 중턱즈음에 자리한 산간도로 정도 되겠다. 중산간 도로 어딜 가나 고즈넉하고 아기자기한 느낌. 휴가철이 아니여서인지 차도 없고 조용한 게 제주도 전세 내고 다니는 느낌 ^^


세미마을 가는 길도 이러했다.


세미마을은 조용하고 정겨운 시골마을이다. 다들 들일에 바쁘신지 집은 비어 있고 우체부만 마을 이 곳 저 곳을 조용히 다니고 낯선 이 지나가면 개 짖는 소리에 따사로운 햇살 부서지는... 얼마간이라도 하릴없이 머물다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더 깊게 만들어 준 곳이 마을 초입에 눈에 띄지도 않게 자리한 세미 마을 본향당이다. 표지판 안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긴가민가하며 숲 속을 찾아 들어갔는데 왠걸, 바람의 느낌이 전혀 다른 옴폭한 평지가 나타나는데 오래된 당나무 한 그루 앞에 시멘트 제단이 차려져 있는 소박한 모습이긴 했으나 예사롭지 않은 장소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여기가 본향당인줄은 모르고 "마을 사람들 제 지내기에 좋은 장소인 거 같다, 더운 여름 날 앉아 책 읽으면 딱이겠는 걸?" 하며 혼자 소리 내보았다. 청량한 바람이 너무 좋아 한참을 즐겼다.


차에 돌아와서 답사기를 보니 딱 그 곳이었네. 하하하. 여행은 즐거워~


차로 이삼분 거리인 다섯 석인상이 있는 <화천사>에 잠시 들렀다. 석인상 얘기는 Jane의 포스팅에 자세히 나와 있다.



jane wrote:


세미마을 본향당과 회천 세미마을 석인상


그곳의 바람은 우아하게 불었습니다. 

제주의 중산간 마을로 접어드는 조천읍 와흘리 어디즈음 자리한 세미마을 본향당 팽나무 아래에 앉아 쐬는 바람은, 우아하고 신비로웠습니다.


사실 세미마을 본향당을 찾는 일은 쉽지가 않아서 헤매었는데, 그 곳이 초행길이었던 우리의 탓도 있지만, 세미마을 본향당은 아마 누구라도 쉽게 찾기 어려웠을 텝니다. 이렇다 할 표지판도 하나 없었고 세미마을 본향당으로 들어가는 길은 차는 커녕 사람도 다니기 어려울 만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그리 깊이 있지는 않았지만) 어수룩하게 덥힌 잡초와 대나무 숲 사이에 있었으니까요.

표지판을 찾을 수도 없고, 점과 선으로만 간단히 안내해준 무책임한(^^;;) 답사책을 보면서 우리는 약간 당황. 이 곳 지리라면 바싹하실 우체부 아저씨께도 여쭤보았지만 세미마을 본향당은 잘 모르십니다.


June은 길을 찾는 감각이 뛰어나 보였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주변을 잘 살핍니다. 표지판을 잘 보기도 하지만, 주변 분위기나 느낌 같은 것으로도 우리가 가려는 장소를 잘 찾아냅니다. 그런 June이 있어 든든. 여행내내 불안함이나 걱정 없이 그를 따랐습니다.


세미마을 본향당을 가는 길도 도로를 따라 가다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여긴가?’ 하고는 June이 먼저 앞서길래 따라 들어갔는데, 돌아보고 나와서 답사책을 보니, 그곳이 세미마을 본당이었더군요. 이 곳이 그 곳인지 몰라 사진도 한장 찍지 않았다는^^


답사책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당은 해묵은 팽나무를 신목으로 삼고, 대나무밭에 의지한 제단이 있을 뿐이다. 찾아가자면 당 안내문이 있는 입구에서 과수원 쪽으로 100미터 정도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라고. 답사책에서 말하는 (덤불에 가려진) 당 안내문을 우리도 보았던 것 같은데, 제줏말로 써 놓았던지 우리는 한 번에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노지 귤 밭 사이를 가로질러 덤불을 헤치고 들어서니 대숲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팽나무 고목이 있고 앞 마당 만한 작은 공간이 있고, 고목 아래로 시멘트로 만든 평평한 단상 같은 것이 전부입니다.

감귤 밭에서 일하는 분들이 잠시 쉬시는 곳일까. 하고 우리는 생각했고 불어오는 바람이 바깥의 그것과 다르다고 그는 연신 말했습니다. 

흐음~ 제주 공항에 처음 내려 깊이 숨을 들이쉬며 ‘역시 제주의 공기가 다르네~’ 하며 우리는 말했었지만, 웬걸, 이곳 세미마을 본향당은 진정한 제주의 바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도로와 불과 100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인데 이 곳 제단에 앉아 맞는 바람은 온도도, 습기도, 냄새도, 소리도 다릅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제주의 바람은 시원하고 상쾌하다고는 하나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 덕에 약간 후덥지근했던 그 바람은 싹 가시고 대숲으로 둘러싸인 신당 안에서 맞는 바람은 차가웠습니다. 

차갑고 가벼워 바람은 신당 터를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돌아나갑니다. 우아하고 신비롭습니다.

이 곳 신당에서 옛 제주민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놓았을까요.


그는 연신 숨을 깊이 들이쉬며 제주의 바람을 가슴 가득 담았습니다.


다시 과수원길을 돌아 나와 신당 맞은편에 있는 회천 오석상을 보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세미마을 본향당과 회천 세미마을 석인상, 그러니까 다섯 개의 석상이 있는 회천 오석상은 마주해 있습니다. 

‘화천사’라는 절 뒷마당에 자리하고 있어서 불상으로 생각하고 찾아가기 쉽지만 절이 자리하기 전 아주 옛날부터 이 다섯 개의 석상은 자리했다고 합니다. 

그냥 딱 보기에도 근엄하신 부처님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짓궂은 표정, 뚱~한 표정, 마주하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어리숙한 표정을 지은 다섯 개의 석상이 있습니다.

반듯하고 매끈하게 깍아 내린 돌이 아니라 제주에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현무암 돌을 그냥 그대로 가져다가 세워놓았는데 그 모습 가운데 얼핏얼핏 제주민들의 얼굴이, 포즈가 서려있습니다.
































 

대체로 우리가 찾은 곳들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 우리 두 사람은 차분하게 그 곳을 둘러볼 수 있었고 여유롭게 바람을 맞거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문하는 곳 마다 잊지 않고 삼배를 올립니다.

제주의 문화와, 한라산과, 그들을 지켜온 자연과 신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입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소중한 흔적들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June] 산천단

여행/제주 2014. 6. 25. 11:33

June wrote:-


흠~ 휴~


제주 산천단 입구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겨우 한 숨 돌린다. 등줄기엔 땀이 삐직삐직...

"등에 땀 났어요."

제인이 한 말씀하시는데 머쓱하다. 말은 안 해도 긴장한 게 느껴졌으리라.


운전 안 한지가 너무 오래 되었고 인도에서 10년 지내다 온 게 한국에서 남의 차 빌려 오랜만에 운전하는 것에 대해 걱정과 부담으로 작용했다. 인도는 한국과 달라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주행방향도 반대이다. 어느덧 익숙해져버려서... 더구나 마지막 해에는 작은 스쿠터 사고까지 난 뒤였으니 뭐랄까, 트라우마 비스무리한 게 생기긴 생긴 모양이다. 한마디로 쫄았지, 뭐. 제주 여행 첫 장소인 산천단에 도착해서 즐거움과 설렘보다는 안도감이 우선이다. 



산천단


고래로부터 고을 수령들께서 한라산을 향해 천신과 산신들께 제사 올리는 곳이다. 해서 제주 왔다고 그 어르신들께 인사도 드리고 이번 제주 여행의 무사안녕을 빌고자 첫 장소로 선택했다. 발원문을 근사하게 한 자락 해볼 요량이었으나 운전하느라 긴장했던 탓인지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고, 옆에 제인 있어 좀 쑥스럽고, 근사한 말들은 생각도 안 나고... 어물어물...   


곰솔 여덟그루가 멋드러지다. 여덟그루인지 꼭 세어본다. 


여행 내내 내가 사진을 다 찍다시피했는데 여기만큼은 긴장한 탓에 내가 찍은 사진이 없는데 다행이 제인이 몇 장 찍었나보다. 하지만 사진 없이 넘어가기 섭섭하니 제주 바다 구경하는 것으로 대신하련다.



어딘가 하면... 제주 북동해안에 있는 어... 월정리! 해수욕장. 너븐숭이 가는 길이었던가?


덧붙이면,

제주 여행/답사에 자동차(렌트카)는 거의 필수이다. 여기저기 제대로 돌아보고자 한다면. 다른 이동수단들도 나름 맛은 있겠지만... 나는 그러니까 15년도 더 전인 어느 해 여름, 이틀 만에 자전거로 제주 일주한 적 있는데 그건 완전 극기훈련, 철인 3종 경기 수준이었음. 렌트카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싸서 놀랐다. 하루에 12,500원 (시기마다, 보험추가에 따라, 업체별로 천차만별) 차도 좋고. 가장 저렴한 경차 예약했는데 같은 가격에 한 단계 높은 2014년 신형 경차 나와서 기분 좋았다는...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한라산 올라갈 때 완전 죽을라고 함. 밟아도 밟아도 대답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