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 / 하지만 가지 않은 길

jane wrote:


지난 유월 열 하룻날 부터해서 다섯 밤을 제주에서 보냈습니다. 

우리가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가끔 흐릿한 날도 있었지만, 대체로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시원했습니다. 

답사와 여행의 중간 즈음 어딘가에 우리는 마음을 두고, 걷고 또 달리며 한라의 품 안에 있었습니다.


6월 11일, 첫째날 우리는 이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산천단-세미마을본향당-회천오석상-와흘본향당-연북정-조천연대-너븐숭이

이름만으로도 낯선 곳들. 세미마을 이라던지, 너븐숭이 같은 곳의 지명은 이름의 한 글자 사이사이에 제주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습니다. ‘제주’ 라고 검색창에 써 넣으면 전혀 나올 것 같지 않은 연관검색어들.


우리 두 사람의 제주 여행에 한 분의 안내자가 계셨는데, 바로 유홍준 교수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7-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이라는 책을 통해서 여섯 날 동안 우리에게 제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마치 옆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해주시듯 자세히 알려주셔서 어떤 때에는 네비게이션이나 가이드북 보다도 더 자세하게 답사 장소들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제주에 도착해 처음 간 곳은 산천단.

이곳은 한라산의 산신께 제사를 드리던 곳입니다.

제주인들은 탐라국 시절부터해서 해마다 한라산 백록담 높은 곳까지 올라 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겨울에는 추위 속에서 제사 지낼 짐들을 들고 오르내리며 적지 않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조선 성종에 부임한 제주목사 이약동 선생이 산신제 지내는 장소를 백록담에서 산 아래 마을 이곳 산천단으로 옮겼다 합니다.


산천단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르른 곰솔나무입니다.


600년 이라는 오랜 세월 여덟 그루의 곰솔이 이 곳 산천단을 지키고 있습니다. 육지의 소나무들과 조금 다르게 나무 껍질 색깔이 어둡고, 잔가지 없이 꼿꼿하게 하늘로 높이 솟아 있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모여 있는 곰솔나무들 사이사이로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어 찾아온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기도 합니다. 바람이 시원하고, 도로가 가까워 찻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곰솔나무 사이사이를 비켜지나가는 바람의 소리가 들립니다.




가만히 허리 숙여 세 번 절을 올려 우리 두 사람은 제주입성을 고했습니다.

나란한 그와 나의 거리가 딱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산천단. 그 옛날 제주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제단 앞에 서서 제주의 무수한 신들께 인사했습니다.

다부지게 자리를 지키고 선 산천단의 여덟 그루 곰솔나무들은 마치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할아버지 마냥 느껴집니다. “할아버지 저희 왔어요.” 라고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한 마디가 튀어나옵니다. 키 크으신 곰솔나무가 "오냐. 자알 왔다~" 하고 허헛 웃음을 내 보이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프지 않고, 사고 나지 않고(여행 내내 그가 운전을 해서 다녔기 때문에) 무사히 여행을 잘 마치기를 은근하게 부탁드려 봅니다.


마음 한 켠에 기쁨과 편안함이 동시에 샘솟으면서 제주에 왔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제주에 오느라 바쁘고 서둘렀던 마음이 한 숨 돌려지며 차분해지고 한가로워졌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제주에 온 것입니다.

jane wrote:


늘 누군가 데려다주고 안내해주는 제주만 다니다가 이번에는 함께 찾아가고 직접 마주하는 제주를 갑니다.
가이드북을 사서 꼼꼼히 읽어보고, 여행 루트를 짜다가 가만가만 생각합니다.

뭔가 이상한데? 우리 땅, 낯선마을 제주를 여행하러가는데 여행루트로 짜놓은 곳의 절반이상은 '제주의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외국 건축가가 지은 교회, 박물관을 보려했던 것입니다.외국에서 살다온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이국적인 게스트하우스에 가보겠노라했고, 거대 자본가가 투자한 (결과적으로는 제주를 무너뜨리는) 명소에 가려했습니다.
이상하더군요.
제주를 보러 가겠다하면서, 가장 제주 답지 못한 곳을 가려하다니.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어 리셋.
다시 여행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여행을 다녀와서 무엇이 내게 남았으면 좋겠는지, 무엇을 알고싶은지, 지금의 삶에서 결핍된 것은 무엇인지.
여행에 가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현실에서 거대자본에, 외국문화에 파묻혀있습니다.
내가 원하던 것은 얼굴도 모르고 언어도 다른 세기의 건축가가 지은 멋진 건물이 아니라
제주를 지켜온 영엄이 깃든 마을의 보호수와 신당인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물질을 나가는 해녀할망의 숨비소리를 듣고싶은 것입니다. 지나가던 바람도 쉬었다 가라고 구멍을 송송 내어 쌓아둔 제주의 돌담을 보고싶은 것입니다.
세월이 깎아놓은 주상절리대와 거문오름에서 흘러 내려 생겼다는 만장굴과 김녕굴을, 청보리 흐드러지게 핀 제주의 들판을 보고싶습니다.
고 김영갑 작가가 그렇게도 담아내고자 했던 용눈이오름에서의 바람을 마음에 담아보고 싶습니다.
오백년, 육백년 그 자리를 지켜온 우리의 어버이, 비자나무를 조우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여행의 방향을 다잡고 다시 여행계획을 세워보는 중입니다.
주로 중산간마을과 해안에 자리한 오래된, 그렇지만 여전히 그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여행해볼까 합니다. 그곳을 걷고, 달려볼까합니다.
영실길 따라 한라산도 올라야지요.

우리 여행의 가이드북은 유홍준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으로 정했습니다.
20대 유년시절 선생님의 이 책들을 가이드북삼아 남도를 비롯한 전국 곳곳을 여행했다는 june의 의견입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그곳의 삶과 문화와 역사를 알아가는데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이지요.

june에게도 제주가 낯선곳은 아닐테지만, 지난 제주여행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소중한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혹은 새로운 제주의 길 위를 함께 달려도 좋겠습니다.

어디라도
우리 함께
그 길 위에서 손맞잡고 이야기 나누며. 마음 나누며.
바람과 햇살, 호흡을 나누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