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길 / 하지만 가지 않은 길

Jane wrote:


[머무름 없는 바람이 부는 곳, 용눈이 오름

용눈이 오름을 사랑한 작가, 김영갑의 갤러리 두모악]


이 곳을 오르는 동안 자꾸만 이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들국화가 노래한 [걱정말아요 그대]가 바로 그 것입니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June이 인도에 있을 때, 한국에 있던 제게 보내 온 노래인데,

(그는 종종 이렇게 노래를 선물해주곤 했는데, 보내주는 노래들 마다 마음에 콕콕 박혀서

가끔은 위로가 되고 가끔은 안식과 휴식이 되어 멀리 있는 그를 대신해 제 손을 잡아주곤 했어요.)

그가 보내준 덕에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때에 저는 지나간 일들로 조금 힘들어하던 때였는데,

 그 가사처럼 아무 걱정도 않고, 지나간 일들은 지나간 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이며 흘려보내곤 했습니다.

 



세찬 바람을 마주하고 우리는 나란히 손잡고 용눈이 오름을 올랐습니다.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은 오름이 바람을 막아주어 고요했지만, 오름 위에 오르니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의 바람이 몸을 휘감고 지나갑니다. 

세찬 바람 덕에 머리카락이 주체가 안 되어서, 멀쩡하게 나온 사진을 찾기가 힘들만큼.

 


 

 

 

 

 

 

 

 

 

 

 

 

 

 

 

 

 

 

그 날은 하늘이 조금 흐려서 백록담도, 저 멀리 푸르른 바다도 보이지 않았지만 

날이 맑으면 용눈이 오름에 올라 제주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오름에 오르니 도로를 달리면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입니다. 

용눈이 오름과 이웃을 하고 있는 다랑쉬 오름, 아끈다랑쉬 오름 그리고 이름을 미처 익히지 못한 오름들이 봉긋봉긋, 울쑥불쑥 크고 작게 올라와 있습니다. 마치 죽이 끓을 때 여기저기서 올록볼록 동그랗게 올라오듯이 그렇게 제주 곳곳에 솟아있는 오름이 여기저기서 "나 여깄어!!" 하며 손을 번쩍 든 듯이, 한눈에 보입니다. 그 오름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중산간 도로들과 거뭇한 돌담으로 둘러싸여 황토빛 붉은 흙을 숨긴 밭과 귤농장,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는 무덤들도 보입니다. 멀리 제주 시내도 보이고, 바다도 슬몃 흐릿하게 보이던가요.


시선을 멀리 하면 이런 것들이 보이고, 시선을 가까이 두면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바람과 몸을 섞은채 흔들리는 갈대

그 사이사이 손톱만큼 자그마하게 크고 있는 들꽃

방문객을 위해 볏단 같은 것으로 매트를 짜서 깔아놓은 그것도 눈에 거슬리지 않고 오름의 갈대들과 자연스레 색이 어울어집니다.

 


바람은 찰나의 순간 불어왔다가 머무름 없이 지나갑니다.

그 바람을 맞으면서 모든 지나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힘들었던 시간들과 그 시간들에 대한 아픔과 또 그 시간들이 준 가르침

그리고 결코 보내고 싶지 않은 행복한 순간들 까지도 모두모두 지나가고

또 지나간 만큼 새로운 시간들이 다가옴을 배웁니다.


June이 보내준 노래만큼이나 이 곳 용눈이 오름은 제게 그런 위로를 줍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니, 괜찮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모든 것은 의미가 있으니, 괜찮다. 그러니 후회하지 말아라.

하고 말입니다.

 

 

제주에 가면 June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곳은 딱 세 곳.

이 곳 용눈이 오름과 한라산 영실. 그리고 김영갑 갤러였습니다.

 


 

수 많은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사진작가 김영갑 선생님의 사진에 담긴 것은

바람과 구름, 파도 같은 것들입니다.

모두 제주에 그득한 것들이고, 자연의 것인 것이고,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것들이지요.

그는 틈만 나면 수십키로그램에 달하는 사진 장비들을 싸들고 이곳 용눈이 오름에 올랐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용눈이 오름에 오르면 자연스레 그가 생각이 나고

그는 이 곳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제주까지 왔는데, 용눈이 오름까지 다녀왔는데, 이곳을 그냥 들르지 않을 수 없어서 은근하게 June에게 이 곳에 가자고 압력 아닌 압력을 가해서, 방문하게 된 두모악 갤러리

 

말년에 그는 루게릭병을 앓았는데, 그의 갤러리 곳곳에 전시된 그의 에세이 가운데 이 구절이 유독 마음에 들어옵니다.


‘구름은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몸이 멀쩡할 때 수없이 봐둔 것들을, 몸져누워 있으며 몸으로 깨달음.

구름이 시시각각 변화하듯, 지금 이 순간도 내 몸의 근의 육들은 굳어 마비되고 있노라. 지금 다만 현재를 살 뿐.’

 

 

 

머리로만 알던 것들, 귀로 들어 담아두기만 했던 가르침들이 몸이 아프며 그제야 진정한 '앎'이 되었던 지난날들이 잔잔하게 떠오르면서

그의 투병생활과 그가 작품에 담고자 했던 무수한 감정들이 새롭게 새록새록 다가왔습니다.

 

 

그의 갤러리는 소박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잔잔하고 덤덤하게 그렇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전시관 밖은 또 하나의 전시관이어서 흙으로 빚고 구운 테라코타 조각들이 푸르른 관목들 사이사이에 수줍게 자리 잡고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관리하는 분의 애정을 가득 받는 듯한 나무와 꽃들이 가득합니다. (사람의 애정과 관심을 받고 자란 식물들은 요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고 차분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만 같아요.)

 


 

 

 

 

한 사람의 인생과 고뇌와 움직임들이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함으로 다가온 시간이었답니다.


함께 온 June이 편안하게 좋아해 주어서 감사한 마음. 안도의 한숨 휴우-

 

대외업무 1_뒷돈을 요구하는 현지 공무원

20140711

 

질문) 대외업무를 오래 하면서 행정 공무원을 많이 만난 것 같은데 현지 공무원과 행정 처리를 할 때 뒷돈도 요구하고 늦게 처리하고 하는데 이럴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궁금 궁금

 

 

가장 좋은 것은 가능하면 현지 공무원 만나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업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운용을 해나가는 것이다. 아예 안 만나고도 일을 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게 가능할까? 하기 나름이다.

 

인도에 있을 때 한국이나 미국에서 헌 옷이나 신발, 담요, 처방전이 필요 없는 의약품 등을 모아 20피트 또는 40피트 컨테이너에 담아 보내주면 이를 받아 세관에서 통관시키고 우리 사업장까지 운송하는 일을 맡아 한 적이 있다. 이거 너무 복잡하고 힘든 일이여서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데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여서 통관과 운송을 대행해주는 현지 업체를 끼고 하게 된다. 처음엔 지출항목들의 세부 내용을 잘 몰라서 알려주지도 않는다 무조건 비용을 깎기만 했는데 나중에 업체도 바꿔가며 몇 번 해보면서 알게 된 게 이 비용에 세관 공무원들에게 들어가는 뒷돈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전체 비용의 약 20-30%의 금액이 뒷돈으로 들어간다. - 이처럼 뒷돈에는 전체 비용에 포함되어 우리가 모르고 주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관행으로 정착된 정도를 넘어 거의 업무처리를 위한 필수비용으로 봐야 할 정도이다. 우리 물건 실은 컨테이너는 부두에 들어와 있는데 이 돈을 안 주면 이 핑계 저 핑계로 통관을 시켜주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컨테이너 대여료, 부두 사용료 등등 이런 비용들이 일일 단위로 달러로 부과되는데 나중에 그야말로 요금 폭탄을 맞게 되어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 


이후 전체 평가를 통해 비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려 더 이상 해외에서 컨테이너를 받지 않기로 했는데 이 결정을 내린 데에는 울며 겨자 먹기 식의 이 뒷돈에 대한 부분이 크게 작용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반면에 현장에서는 뒷돈을 요구하는 현지 공무원들을 피해갈 수 없는 자잘한 일들이 생긴다. 이런 저런 일들을 만들어 자기들이 직접 찾아오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자 들어 보세요. 뒷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첫째, 청탁성의 뒷돈이다. 등록이나 인허가 관련 업무들이 주로 많은데 이 돈만 주면 무조건 되게 해주겠다며 요구하는데 은밀하고 교묘하게 진행이 된다. 대개 금액이 크고, 대체로 위험하다.

 

둘째, 앞서 얘기한 경우처럼 관행으로 자리 잡아 거의 업무처리비로 받아들여할 뒷돈 아닌 뒷돈이 있다. 돈 받은 사람은 뒷돈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도와준 데 대한 당연한 대가로 여기는 분위기이다.

 

셋째, 그야말로 애교 수준의 뒷돈들이 있다. 속칭 짜이 (인도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밀크 티) 이라 부르는데, 단순 복사 서류 발급이나 자기네가 당연히 처리해줘야 할 일들을 하고선 예의 그 짜이 값을 요구한다. 업무의 성격에 따라 다른데 작게는 50루피 (한화 1,000)에서 많게는 200에서 300루피 (한화 6,000루피) 정도가 암묵적인 협정가이다. 어느 때인가, 찌는 여름 날 지하 서류 창고에서 법인 등록증 한 장 달랑 복사해오면서 그 짜이 값을 요구하는데 하도 짜증이 나서 진짜 짜이 값 5루피만 줘버리고 나온 적도 있었다.

 

이런 여러 형태의 뒷돈에 대해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속 편하다. 나머지는 거기에 따라서 일이 되게 되어 있다. 원칙의 기준이 세면 센대로, 약하면 약한대로 그에 따른 과보가 있는 것이다.

 

내가 일한 단체의 경우에는 사업초기부터 일은 좀 안 되더라도 뒷돈 줘 가면서 까지는 하지 않겠다.’라는 강력한 원칙이 있었고 나 역시 절대 공감했기에 몸은 힘들었을지언정 뒷돈을 줄까 말까로 고민하느라 머리가 아파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뒷돈 요구하면 방긋 웃으며 오 이런, 미안합니다. 당신 수고하는 줄 잘 알고 있어요.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가볍게 받아친다. 만약 상대가 너무 진지하다면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하지만 저희 원칙상 어려워요. 후원금 받은 거라 일 루피도 허투루 쓰면 안 되거든요. 모든 걸 한국에 보고하고 결재 받아야 해요. 저도 완전 자원봉사거든요. 일 루피도 안 받아요. (애절하게) 암 쏘오오리~.” 이 정도 하면 일단은 그 쪽에서 물러난다. 해 준다는 얘기가 아니라 일단 돌아간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와서 똑같은 얘기 반복. 받으려는 사람도 안 줄려는 사람도 끈질기다.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고, 이거 가져 오라면 이거 가져가고저거 가져 오라면 저거 가져가고……. 일은 안 되기도 하고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려 되기도 했다.

 

이게 반복이 되면 자주 가는 데는 그 사람들이 우리 보면 딱 안다. 쟤네들은 절대 뒷돈 안 주는 애들이라고. 그러면 그냥 해주는가? 아니다. 그렇게 알고 있기만 한다. 그런데 이게 일 년, 이 년 지나고 십 년 정도 지나면 그 때는 또 해주는가? 아니다. 일은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 돈 안 줘서 안 되기도 하지만 돈 안 줘도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조용히 나돈다. “쟤네들 잘 해. 좋은 단체야.”

 

뒷돈에 대한 원칙은 여러 가지 현지 사정을 봐가며 단체 내에서 잘 논의해서 알아서 정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일이 안 될지언정 어떤 형태의 뒷돈도 주지 않는다든지 첫 번째 성격의 뒷돈은 절대 안 주고 두 번째, 세 번째 성격의 뒷돈은 현장에서 알아서 판단한다는 식으로 원칙을 정해 놓고 그 원칙을 따르는 게 가장 속 편하다. 그리고 이런 원칙도 있을 수 있겠다. 다른 지역에 가서는 예를 들면 수도나 이런 데 가서는 업무 효율을 우선순위에 두고 결정하더라도 우리 사업 영역 내에서는 짜이 값정도의 뒷돈일지라도 가능하면 안 주겠다 또는 절대 안 주겠다. 잘 판단해서 알아서들 하시라.


돈 대신에 간단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선물도 뒷돈의 다른 형태로 볼 수도 있지만 부담이 되지 않는 성의와 감사 표시 수준의 선물들이 있다. 내가 사용했던 걸로는 여러 가지 색깔 볼펜, 한국 문양이 들어가 있는 핸드폰 고리, 액정 닦는 고리, 수건이나 손수건, 양말, 한국 부채, 달력 등 그 때 마다 있는 물건들 중에서 골라 썼는데 조금은 이국적이면서 특별한 느낌이 나는 선물들이 좋다. 첫 인사할 때나 간단한 답례품으로 쓸 수 있다. 하지만 고위 공무원들에게 선물을 하고자 할 때는 여러모로 조심을 해야 한다. 자칫 뇌물로 비쳐질 수 있는 선물을 해서도 안 되고 너무 격이 떨어져서도 안 된다. 현지 수준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선택을 해야 한다. 앞서 말한 정도도 고위 공무원들을 만나거나 안면 틀 때 또는 얼굴 도장 찍고자 할 때 사용하면 좋다. 그리고 고위 공무원에 대한 답례 수준의 선물로는 한국에서 온 담요나 세정용품 선물세트를 이용한 적이 있다.


Jane wrote:


 

일곱 번째 제주 여행기입니다.

제주 여행기를 마무리하지 않으면 다음 여행은 없다는, June의 협박이 은근 걸리적걸리적-

게으름 피우던 마음을 다잡아 기억을 주섬주섬 끄내어 봅니다.


어제 해가 어스름 질 무렵에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다녀왔어요.

도서관에서 제주 4·3 사건 이야기를 담은 현기영선생님의 [순이삼촌] 책을 빌려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거의 9시가 다 된 시간이었는데, 도서관을 나와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오는 길.


 

아파트 단지를 걸어오는데, 한 가족이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아파트 현관에서 나와 차로 향합니다.

선두에 선 사람은 그 집 아버지인데, 한 손에는 텐트를, 한 손에는 손잡이 달린 플라스틱 박스 가득 버너와 코펠 같은 것을 들고 가더라구요.

뒤 이어 꼬마 아이는 자기 상반신만한 배낭을 메고 신난 발걸음으로 쫒아오고, 

엄마는 양 손 가득 비닐봉투에 먹거리를 싸들고 약간은 들뜬 표정으로 마지막을 행렬을 장식합니다.


 

‘금요일 밤, 주말에 캠핑 하려나 보구나!’ 하고 세 가족을 보는 제 얼굴이 미소가 슬몃 떠오르면서,

그와 제주에서 캠핑을 하던 것이 생각나더군요.


 

그에게도, 저에게도 캠핑은 처음인데, 요즘 대세라는 캠핑을 즐기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거의 일주일이 되는 제주 여행의 숙박비가 은근 부담이 되어서, 숙박비를 줄여볼까 하고 선택한 곳이었답니다.

육지에서는 캠핑이 몇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경기지역 주변으로 도심에, 외곽에 캠핑지가 많고 온갖가지 캠핑 도구들이 한바탕 휩쓸고 가서, 이제는 슬슬 시들어 가는 즈음이지만,

제주는 캠핑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마치 어젯밤처럼 그 날도 달이 꽉 찬 보름이어서, 어두운 캠핑장의 밤을 은은히 밝게 비춰주었습니다.

조금 가져간 쌀이며 식재료들을 부려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동안

June이 나무를 가져다 한 켠에 불을 피울 준비를 하고 그랬어요.

 

 

우리는 몇 평 되지도 않을 텐트와 텐트 앞 마당에서 이틀을 보내며

간소한 삶의 편안함과 담백함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도록 만드는 그런 편안함과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넘쳐나는 그런 과함 말고,

약간 더 걸어야 하고 움직여야 해서 동선이 길지만, 그것이 없어서 이것으로 어설프게 대신해야 하지만

그래서 편안하고 소소하게 재미있었다.

하는 것이 저의 이틀간, 캠핑 소감 이랍니다!!^^


좀 싱거운 글^^